교구성지

교구성지
계산성당

1885년 12월 제7대 교구장(조선교구장) 백주교께서 대구본당을 신설하고, 초대본당 주임으로 불란서의 김보록 바오로 신부(Achille Paul Robert)를 임명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읍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나무골에서 3년간 은신 전교하셨다.
1886년 한불조약 후에 신앙의 자유가 넓게 허용되었다. 그래서 1888년 겨울 김보록 신부는 신나무골에서 대구읍내의 교회 진출을 위해서 대구와 가까운 죽전 새방골(대구시 서구 상리동)로 옮겨 3 년간 은신 전교하면서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고 밤이면 상복으로 변장하고 각급 교우들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1891년 새방골에서 읍내로 들어와서 성밖 대야불 정규옥 승지댁에서 7년 동안 전교하면서 영구적인 본당을 설치할 부지를 물색하던 중 1897년 3월 김보록 신부는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와 그 서편에 있는 동산 두 곳을 물색하였다.
김보록 신부는 동산 전부를 150냥에 매입하려고 결정하였으나, 신자들 특히 노인층 신자들은 현 계산성당 자리가 좋다고 하였다. 그들은 구릉 지대이며, 허허벌판 지대에(당시 황무지) 성당 자리를 잡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전국 어느 곳을 막론하고 성당의 위치는 대개 높은 지대에 있어 마을이나 전 시가를 내려다보게 되는데 대구에서는 시내에서도 제일 저 지대인 평지에 위치하게 되었다.

십자형 성당(十字型 聖堂)의 건립
계산동에 정착한 김보록 신부는 신자들이 성전 건축과 신부의 새 사제관[사랑]을 짓기 위해서 한결같이 보여준 열성으로 3년 만인 1899년 이른 봄 한식(韓式)으로 지은 십자형 기와집 성당과 신부 사랑과 신자 교육관으로 사용될 해성재(海星齋) 건물 등을 건축했다.
사제관인 신부 사랑은 2층으로 지었으며, 채색을 잘하는 스님 5명을 고용하여 성당과 사제관을 화려하게 단청(丹靑)하였다. 그런데 성당과 사제관을 단청한 스님들 중 2명이 천주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서울에 세워진 약현(중림동)성당, 종현(명동 1898)성당, 인천 답동(1896)성당 등은 모두 서양식 건물인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워진 대구 성당은 순수한 한식으로 동양 건축이었다.
1899 12월 25일 루르드의 성모께 헌당식과 축성식을 성대히 거행하고, 성모성당이라 하였다.

십자형 성전의 화재
십자형 성당은 봉헌 축성한 후 불과 40일 만에 1900년 2월 4일 밤 8시경에 원인 모를 불이 나서 십자형 성당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때의 화제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고했던 김보록 신부의 서한은 다음과 같았다.
"한국 건축 양식의 걸작으로 그토록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던 아름다운 노틀담(성모 마리아)의 루르드 성당이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화 하였다.
지난 2월 4일, 5일 밤 사이 나는 이상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다. 즉시 일어나서 문을 열어 보니까 한국식 십자형 성당이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얼른 뛰어가 성당 옆문을 박차고 성가대석으로 뛰어 들어가려 했지만, 발을 들여놓자 불길이 번져 황급히 물러나 마당 밖으로 나와 쓰러졌다. 얼굴은 반쯤 화상을 입은 채 몸을 일으켜 종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위급함을 알렸다. 잠시 후 신자들과 지역 주민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조선 군대와 일본 군대도 달려왔다. 그렇지만 너무 늦었다.
건물 내부가 온통 화염에 휩싸여 창문과 출입문 등으로 불길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가까이 간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근처에 있는 집은 보호하자면 이미 불이 붙은 성전은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이 서쪽으로 14m 떨어져 있는 해성재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성수가 가득 담긴 병과 루르드의 물병을 들고 나와 불 속에 던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화염이 건물 안으로 몰려들더니, 이웃 초가집들은 손상을 입히지 않고 사그러들었다. 화재는 지진 때문에 발생한 것 같다. 지난 2월 4일 오후 8시에 대구에서는 매우 강력한 지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제대 위에 세워 둔 촛대가 지진의 진동으로 넘어져 제대 보와 양탄자 등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25년전 교난에 휩싸인 조선에 들어왔을 때 나에게는 작지만 아담한 성당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제의도 일상복도 생활 필수품도 없으며, 고해를 듣기 위한 영대와 중백의 조차도 없다.
1천명이 넘는 신자들이 주일날 미사에 참석하는 데 바람막이조차 없었다. 성모 마리아께서 두 번째 성당을 짓기 위한 건립 기금을 마련해 주실 때까지 가 건물이라도 세워야겠다. 한국식 십자형 성당은 이미 너무 협소해서 더 크게 석재로 지을 것이다. 신자들의 기도와 성모 마리아께 대한 믿음에 자비를 구하면서 나는 다시 성전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사제가 되어야 겠다."
고딕식 새 성전을 다시 건립함 본당 설립 후 14년만에 어렵게 건립된 십자형 성당이 이렇게 화재로 소실되자 모든 신자들은 큰 충격을 받고 허탈감에 빠졌다.
그러나 김보록 신부만은 별로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화재가 발생 한지 1주일이 지난 1900년 2월 10일자로 새로운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위한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천주께서 하시는 일은 놀랍고 두렵고 거룩하신데, 이는 우리의 신덕을 시험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인 줄로 받아 들이고, 다시 성당을 더욱 잘 짓기로 한 마음으로 협력합시다."라고 했다.
김보록 신부는 교회 중진의 협력으로 벽돌로 내화구조와 성당 재건계획을 세우고 손수 설계하여 현재의 계산동 성당은 1901년에 착공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양옥 축조의 경험자가 없었으므로 중국(청)에서 벽돌공과 미장이, 목수를 데려 와서 일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들의 기술도 신통한 것이 아니었다.
12사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함석류, 창호철물 등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각종 자재는 불란서 본 국에다 주문하여, 착공한지 1년만인 1902년 5월에 양식성당을 준공하였고, 1903년 11월 1일(모든 성 인의 날) 대축일에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성대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이 성당은 국내에서도 찾기 힘든 정면 쌍탑의 고딕성당이다.
구조와 세부상세는 오히려 로마네스 크양식에 가깝다고 하겠으나 평면 구성은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 3랑식 열주의 아케이드(Aceade)를 이루고 천정에 의해 네이브(Nave)와 아일 (Aisle)의 구획이 뚜렷이 되어 있다. 주현관은 서쪽 정면의 나르텍스(narthex)의 좌우 아일부에 2개의 동일한 종탑이 차지하고 있다.
전체성당은 화강석 기초 위에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았는데, 회색 이형벽돌의 사용은 버트레 스(Buttress)와 정면 출입구 및 창둘레, 그리고 내부 열주와 천정 리브에 집중하여 구조체와 장식을 겸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정면 중앙에 있는 박공부분의 큰 장미창과 좌우 익랑 박공부문의 창미창은 이 건물을 한층 화려하고 또한 엄숙하게 하고 있다.
그때 2개의 종탑에 달 종도 축성되는 예식이 있었다. 두 개의 종은 서상돈 아우구스띠노와 정규 옥의 부인 김젤마나가 기증했으므로 종의 명칭도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띠노와 젤마나로 명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남 지방에서는 최초의 웅장한 고딕식 건물의 성전이 세워졌다.
주교좌(계산동)성당 증축공사 완공 1911년 6월 11일 대구교구 설정으로 주교좌 본당이 된 대구 대성당(계산동)은 그 동안 신자수가 급격히 늘어나서 주일과 교구의 모든 전례 행사때 마다 큰 불편을 겪었다.
그리하여 1911년 7월 2일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본당의 루르드 성모상 앞에서 대목구를 봉헌하는 허원식을 거행할 때도 신학교, 수녀원, 주교관 설립과 함께 이대 성당의 증축을 소원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종학 베드로와 한윤화 야고보가 총 경비 2만여원의 거액을 자진 분담하여, 종각 지붕을 배로 높이고, 성당 뒤편을 물려서 남북으로 남개를 달아 증축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12월 24 일 준공하였으며, 새 성전의 축성식(헌당식)이 1919년 5월 11일 성대히 거행 되었다.
1981년 10월에 문화공보부에서 이 성전 건물을 사적 제290호로 지정했다. 그리고 1984년 5월 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방문하였다.

대보수 공사
1991년 6월 21일 성당 건립 이후 처음으로 대보수 공사가 착공되었으며, 1992년 8월 14일에 완료하였다. 이어 다음날인 199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준공 기념 미사가 있었다. 이 공사를 통하여 지붕은 함석을 해체하고 동판으로, 바닥은 목재 대신 대리석으로, 그리고 창호, 스테인드글라스, 전기 공사가 이루어졌다.
현재 교적상 신자수는 12,000여명이며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모시고 있다.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2가 71
연락처 : (053) 254-2300, 254-2301
이메일 : ca21001@tgcatholic.or.kr
홈페이지 : http://ch.catholic.or.kr/gyesan/

성 유스티노 신학교 기념관

1911년 주선교구(서울교구)에서 대구교구가 분리된 후 초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드망즈 주교가 교구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5월 27일 신학생 58명의 등록으로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현 대구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이다. 1944년 말 일제의 전문학교령에 의하여 경성 천주교신학교(용산 신학교)에 통합될 때까지 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8,15이후에도 신학교는 재건되지 못하고 1946년 옛날 신학교의 자리에 대건 중학교가 건립되었다.
이 건물은 대구 천주교회의 초대교구장이었던 드망즈(안세화) 주교가 중국인 벽돌공을 동원하여 1913년에 착공 1914년에 완공한 붉은 벽돌 쌓기 2층 신학교 건물로 서울 명동성당의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 신부가 건립계획을 세웠고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담당하였으며 책임목수는 프랑스 영사관을 건축할 때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한다.
학교는 ㄷ 자형 평면으로 중앙에 있는 성당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며 1층 전면에는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연속아치로 툇간을 설치하여 복도로 사용하고 2층은 계단실을 통하여 각 실을 연결하였다. 현재는 전면으로 돌출 되었던 양익(兩翼)은 철거되고 중심부분만 남아있다.

관덕정

대구 감영이 있던 관덕정은 55명의 순교자를 낸 곳으로 당시의 박해 상황을 짐작케 하여 준다.
관덕정은 옛 아미산 북쪽아래 대구읍성남문 즉, 영남 제1문 밖 서남으로 200보쯤 되는 지점에 있던 대구 감영의 도시청(都試廳)이었다.
관덕정 부근은 평시에 무예를 닦는 곳이 되었고 더 남쪽 아미산(娥眉山)은 죄수를 처형하던 사형장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을해박해(1815)와 정해박해(1827), 기해박해(1839)와 병인박해(1866) 등 역대 박해 때마다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사형집행을 당하였다.
역대 박해와 관덕정에서 참수당한 순교자들 다블뤼 안 주교께서 신나물골과 대구읍을 가리켜서 "그 지방은 매우 작고 의심을 받는 지역으로서 20-30명밖에는 성사를 집행할 수 없는 공소이다.
그러나 이 지방은 큰 읍내의 작은 핵심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다행한 지방이다. 이 큰 읍은 여러 시기에 걸쳐 순교자들이 많이 난 곳으로 유명하다" 하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당시 대구는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위치상 또는 군사상 그 중요함이 인정되어 1593년 달성에 감영이 설치된 후 선조 34년(1601)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확정되어 안착함에 따라서 현재 대구 포정동(현 중앙공원)에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이때부터 도내 전역의 중죄인들을 다스리는 최고 사법권을 가진 감사가 주재하게 되어서 자연히 각종 죄를 지은 모든 사람들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 감영부근인 서내동(西內洞)에 설치되었으며 또한 이곳 관덕정과 앞에서 말한 곳에 죄수들을 처형하는 형장이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을해박해 이후 정해박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등 역대 박해 때마다 경상도 전역에서 체포된 많은 우리 천주교 신자들이 대구로 이송되어와서 감영옥에서 옥사하거나 혹은 형장에서 순교를 하였다.
그 수는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관덕정에서 순교한 분은 을해박해 때 7명, 정해.기해박해 때 4명, 병인박해 때 14명 등 25명이며, 감옥에서 옥하한 순교자는 을해박해 때 26명, 정해박해 때 3명, 병인박해 때 2명 등 31명이다. 그리하여 대구 감영옥과 관덕정에서 순교한 신자수는 56명에 이른다.

순교기념관
1991년 1월 20일 관덕정 경당 축복 및 이윤일 성인유해 이전 봉안식이 있었고, 5월 31일 개관을 하였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순교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신 이윤일(요한) 성인을 찬미하고 기념하고자 건립된 것이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이다.
이 기념관 건립사업은 대구대교구에서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여 성지개발의 첫 사업으로 시행된 것이다. 기념관의 위치는 현 동아쇼핑센터 맞은편 적십자 병원 뒷편에 있다.
건물모양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단청무늬색체로 된 누각이며 건물벽은 근세 우리나라에서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축조된 보루와 같이 네모로 된 구멍이 있고 건물 바깥벽에는 순교자를 상징하는 돋음새김이 있다.
기념관 내부에는 지하층에 경당이 있고 경당을 향하여 오른편에 이윤일(요한) 성인의 유해를 모신 돌제대와 영정이 모셔진 유해실이 있다. 경당 맞은편엔 제1전시장 있는데, 여기엔 대구대교구의 발전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상 1층 로비에 있는 스테인드글래스의 그림은 순교자를 상징하며 바닥에는 조선조 말기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입증하는 척화비와 조선조 형구인 황새바위가 놓여 있다. 지상 2층에는 제2전시장이 있다.
지상 3층은 제3전시장과 누각이 있다. 이 전시장에는 이윤일(요한) 성인의 일대기와 대구대교구 발전사를 스테인드글래스에 잘 묘사하고 있으며 드망즈 주교와 서정길 주교의 유품이 있고, 한역서학서를 비롯하여 각종 공과책이 있다.

* 개관시간
월요일 10:00~17:00
화요일~주일 09:00~18:00
* 미사시간
화요일 오전 10시
금요일 오후 3시 순교자현양미사
토요일 오후 6시 특전미사
첫째주 토요일 오후 6시 후원회원을 위한 미사
* 교회사 강좌(무료)
매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5시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 2동 938-19
연락처 : (053) 254-0151
이메일 : martyr23@kornet.net
홈페이지 : http://ohmy114.com/

성모당

1911년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어 대구교구가 창설되면서 드망즈 주교님이 초대 교구장으로 오셨다. 교구로서 갖추어야 할 시설이 거의 없는 상태로 조선대목구로부터 가난만을 함께 나누어 가지고 와 새 임지에 며칠을 지낸 드망즈 주교는 1911년 7월 2일 대구대목구를 성모께 완전히 의탁하는 믿음으로 허원을 드렸다. 성모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등을 다 이룰 수 있다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 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드망즈 주교가 성모께 허원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 성모당 건립을 완성한 후 이의 완성과 그 과정에 대한 증거로 주교가 쓴 글을 통해서 성모당의 설립배경과 함께 성모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알 수가 있다.
"플로리아노 드망즈 아드라스의 명의 주교요, 대구의 감목은 하느님의 은총과 교황 성부의 은혜로, 여기 참석한 분들과 함께 새로 발족한 대구교구 7년의 지난날에 대한 깊은 감사와 앞으로 자녀로서의 신뢰를, 원죄없이 잉태되신 루르드의 성모께 바치며 이를 증거로 남기고자 합니다. 교황 비오 10세께서 이 교구를 설정하시어 우리는 이곳에 왔습니다. 새교구의 기틀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였으나, 작은 집 하나도 지을 수 없이 가난한 형편이었습니다. 1911년 7월 2일 대구에 와서 처음 맞는 주일, 우리는 루르드의 성모를 이 교구의 주보로 모시고, 이 교구의 재정 관리자가 되어 주시기를 겸손되이 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허원을 하였습니다.
성모께서 교구기금을 사용하지 않고 주교관과 선교사들의 회합과 휴양을 위한 집과 신학교를 짓고, 주교좌 성당답게 루르드의 성모성당을 증축하게 해 주시면 주교관 대지가 될 땅에 루르드 성모동굴을 가장 닮은 성모동굴을 만들겠다고 허원하였습니다. 이 허원 내용을 세 통 마련하여 한 통은 루르드로 발송했고, 다른 한 통은 대구의 루르드 성모성당에 있는 성모상 밑에 두었다가 1918년 5월 20일 증축공사로 회수하였고, 또 한 통은 대구교구문고에 보관하였습니다. 이 허원은 1911년 7월 2일 공문으로 사제들에게 통보되었습니다.
천주의 성모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재정 관리인이 되어 주셨고, 세계 각처에서 보내온 헌금으로 허원의 소청 뿐만 아니라 전쟁 때문에 유지비 마저 부족하던 교구의 기금을 쓰지 않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할 수 있게 도와 주셨습니다.
첫째는 1913년 주교관을 완공한 일이었고, 둘째는 1914년 신학교를 건립한 일이었습니다. 셋째 청이 이루어지기가 어려워 성모굴은 상당히 늦어질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1916년 소세(Saucet)신부가 중병으로 앓았고, 임종에 이르렀다는 의사의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 주시면 주교좌 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만들겠다는 약속을 새로 하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그를 낫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1917년 7월 31일 성모동굴 정지작업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좋으신 성모님은 해가 바뀌기 전 첫날인 1917년 12월 30일, 이로부터 두 달 안으로 주교좌 성당 증축을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주심으로써 허원의 셋째 청도 들어주셨습니다.
성모동굴은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가톨릭 청년회관, 그리고 대구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곳에 만들었습니다. 성모동굴의 설계와 모형은 루르드의 것을 본따고 성모동굴의 크기는 물론 바위모양까지도 되도록 루르드의 성모동굴과 흡사하게 만들었으며, 외부는 벽돌로, 굴내부는 시멘트로, 기념틀의 모양은 교황 레오 13세께서 바티칸 정원에 만들어 놓으신 루르드의 성모 기념 동굴 모양을 본뜬 것입니다. 성모상은 대구교구의 프랑스인과 한국인 사제들의 자발적인 헌금으로 마련되었습니다.
1918년 10월 13일 성령강림 후 21주일 교구내의 사제단과 신학생들이 참석하고 대구와 각처의 남녀 신자들이 광장을 가득 채운 가운데 먼저 성모동굴과 성모상을 축성하였고, 성모동굴 제단에서 대미사, 성체강복이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한국인, 일본인, 신자들, 신학생들, 사제단이 차례로 기도드렸고, 루르드의 아베마리아를 먼저 라틴어, 한국어, 일본어 마지막에는 불어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대미사 후에는 모든 신자들에게 순례를 청하는 성모 동굴 순례에 대한 사목교서를 읽고 공포하였습니다. 이 사목교서는 각 본당 신부에게 배부하여 각각 본당에서 읽게 하고 이날 이후 처음 방문하는 공소마다 읽게 하였습니다."
성모당은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고장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큰교구적 외부행사의 식장으로 사용되었으며 외교인들에게도 호기심을 갖게 만드는 대구의 명소가 되어왔다. 또한 역대 교황사절의 내림 환영식과 교구적인 큰 경축에 기념행사의 식장은 의례껏 성모당이 되어 왔었다.
1973년부터 5월이 되면 시내의 각 본당별로 성모의 밤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는 대구의 성모당을 더욱 유명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성모의 밤'이라는 새로운 기도형식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성모신심운동의 불을 붙여 놓았다 할 수 있다. 더욱이 1984년 5월 5일 선교 200주년의 대구 행사를 위하여 내한한 교황 바오로 2세께서는 직접 이 '루르드의 성모동굴'에서 교구 내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성모께 기도를 바치고 대화를 나눈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었다.
이러한 성모당에서는 1997년 2월 18일부터 4월 16일까지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이 단장을 하였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께서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란 뜻이다.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연락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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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 등록 안됨

한티순교성지

1. 위치와 연혁
대구에서 북쪽으로 24Km쯤, 행정구역으로는 경상 북도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에 자리한 한티는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간이다. 산줄기로 치면 팔공 산괴의 맥에 걸쳐져 있고 해발 600m를 넘는 이 심심 산골은 박해 때 교우들이 난을 피해 몸을 숨긴 곳이요 처형을 당한 곳이며 또 그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완벽한 순교 성지이다.
태백 산맥의 보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팔공산, 가산, 유학산까지 이르는 팔공산괴는 칠곡, 대구, 경산, 영천, 군위의 5개 군에 걸쳐져 있다. 그리하여 그 장구한 산줄기의 배면을 동북에 돌리고 대구 분지에 전면을 두어 병풍과 같이 대구의 북쪽을 가리고 있다.
예로부터 대구를 지키는 군사적 요새 팔공 산괴의 주령인 인봉에서 가산까지는 20km 정도로, 한티는 가신과 주봉인 팔공산 사이에 위치하며 가산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진 깊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가산산성(사적 216호)은 임진왜란 이후 대구를 지키는 외성으로 난이 일어날 때마다 인근 고을 주민들이 피난했던 내지의 요새였다. 한티 역시 천혜의 은둔지로서 박해를 피해 나온 교우들이 몸을 숨기고 교우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 경신박해(1860)와 병인박해(1866-1873)
험악한 산중턱인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인근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 박해 후에 대구 감옥에 갇힌 신자들의 가족들이 서로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 이곳에 와서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해서 신나무골에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요아킴 가정이 1838년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욱 깊은 산골인 인근의 이곳 한티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1860년 경신박해 때까지 이곳에 살다가 대구로 나가서 대구읍내 첫 신자 가정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교회 창설에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신자들이 한두 집 모여들어 움막을 짓고 사기와 숯을 굽고 화전을 일구어 생계를 유지하던 적은 신자들이었으나 차츰 커져서 이미 1850년대 말경에는 본 부락뿐만 아니라 인근의 서촌과 한밤 및 원당의 외교인들까지 입교하게 되어 큰 신자촌이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1860년 경신박해가 일어나자 전교활동이 한창 활발했던 경상도 지방의 신자촌들이 모두 포졸들에게 유린되었다. 이곳 한티 뿐 아니라 인근의 신나무골과 어골의 신자촌들의 신자들도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아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어골의 이재영 고스마 가정은 문중박해를 피해서 대구 부근의 새방골 죽전으로 피신을 했었다. 그러나 곧 몇 달 후에 박해가 수그러지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1862년 베르뇌 주교의 성무 집행 보고서에는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았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박해 중에 김현상 요아킴 가정의 후손들이 대구로 나감으로 새로이 상주 구두실이 고향인 조 가롤로 가정이 중심이 되어 모든 신자들이 그 집에 모여서 주일미사를 보고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조 가롤로 가정은 당시 세도가인 풍양 조씨 조대비의 친척으로 1839년 기해박해를 일으킨 장본인들이므로 그가 천주교를 믿자 문중에서는 그의 집을 불사르고 고향에서 쫓아내었다. 이때 조 가롤로 가정은 상촌과 황간 등지에서 3년간 전전 하다가 이곳 한티로 온 것이다. 1865년경에는 대구 날뫼에 살던 이 알로이시오 가정도 이곳으로 이사를 왔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시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신자촌들이 모두 유린되었고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순교를 했다.
이때 대구 읍내과 신나무골 등 인근의 신자들은 그해 부활 판공성사를 주기 위해서 대구에 왔던 리델 신부로부터 박해의 소식을 듣자 문경 한실과 한티로 피난을 왔었다. 즉 한티에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간 김현상 요아킴의 후손들인 김응진 가롤로 가정과 몇 해 전에 대구로 이사를 온 서상돈 아우구스띠노 및 삼촌 서익순과 대구 부근의 노곡동에 살던 송씨 가정뿐 아니라 신나무골에 살았던 많은 신자가정들이 이곳 한티에 피난을 왔었다.
그해 봄에 대구에서 문경 한실로 이사를 갔던 서태순 가정이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진영으로 끌려갔었다그러나 부인 김데레사는 마침 감옥에서 해산을 하였으므로 풀려났고 서태순 베드로는 12월19일에 순교를 하였다. 그러자 한티에서 피난 중에 있던 그의 조카 서상돈 등 그의 형제와 친척들에 의해서 서태순 베드로의 시신을 한티로 가져와서 묻었다.
이듬해인 1867년에 박해가 조금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서태순의 형인 서익순과 이 알로이시오가 한티에서 대구 본가로 돌아가다가 경포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듬해인 1868년에 절두산에서 많은 신자들과 함께 창호지로 얼굴을 가리고 물을 뿌려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로 숨진 다음 한강물에 던져져서 순교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시신은 영영 찾지 못하였다.
한편 대원군의 부친인 남영군의 묘를 파헤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더욱 박해가 전국적으로 격화된 봄에 한티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쳐 공소회장 조 가롤로, 부인 최 발바라, 동생 조아기등 조씨 일가족들과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포졸들은 배교하는 사람들에게는 “너희들은 양민이다”하면서 놓아주고, 신앙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정식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당시 나라의 선참후계의 명령에 따라서 무지막지하게 그 자리에서 30여 명을 순교시켰다.
조용하던 한티 마을은 갑자기 피바다가 되었다. 더욱이 포졸들은 신자들을 압송하여 가다가 서울과 상주로 가는 가도인 동명원의 흑다리골에서도 많은 신자들을 죽였다고 한다. 다행이 이때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졸들이 물러간 다음 이들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서 그 자리에 매장을 하였다.
이때 이들이 쓰던 묵주와 고상도 함께 묻었다고 한다. 한편 조가롤로 회장과 부인 최발바라와 그의 누이동생 조아기의 시신도 사기굴 바로 앞에 있던 그들의 밭에 나란히 묻었다. 그리하여 이 한티는 순교자들이 살던 신자촌이며 또한 그들이 처형을 당한 순교지였을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여 있는 완전한 순교성지가 되었다.
조가롤로 회장의 아들인 조영학 토마는 12세 가량의 어린 나이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데 박해 후에 부친이 신앙을 이어받아서 공소책임자가 되고 다른 살아남은 박만수 요셉 가족들과 함께 공소재건에 앞장을 섰다. 그 무렵에 군위 치솔에서 김재윤 가정과 그의 친척인 김윤하 안드레아 가정이 이사를 오고 또한 신나무골에서 이사간 배순규 가정과 조규성 프란치스꼬 가정들이 이사를 왔으므로 다시 공소가 번창해졌다.
병인박해 10년 후인 1882-1883년 장차 대구본당의 첫 주임사제인 김보록 신부가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면서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때 공소신자의 수는39명으로, 고백성사자가 20명, 영성체자가 19명, 세례자가 3명, 혼배성사가 1쌍이었다.
그후 1885년 12월 대구본당이 설립되어 김신부가 신나무골에 정착하게 되자 그는 자주 이곳이 와서 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이곳 공소신자들도 큰 축일날에는 밤중에 90리 길을 걸어 신나무골에 가서 미사를 참석하였다. 이렇게 해서 1900년 초에는 공소 신자수가 80명 이상이나 되었다. 그러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공소회장인 조영학 토마 가정을 비롯해서 김재윤 후손의 김회장 및 조규성 프란치스꼬, 배순규 야고보의 가정의 후손들이 모두 살기가 불편한 이곳을 떠나 일본이나 만주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하여 1960년 이후에는 마지막 한티공소 회장이었던 김태현 마르첼리노 회장 가정마저 떠나버리고 오직 동생 김복현 프란치스꼬 가정만이 현재 남아서 한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주소 : 경북 칠곡군 동명면 득명동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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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무골

1. 위치
경부고속국도 왜관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오면 바로 4번 국도와 연결되는데 우측으로 가면 왜관읍이고 좌측으로 가면 대구가 된다. 대구쪽으로 4km정도 가면 길 오른쪽으로 연화읍이 있고 조금 더 가면 왼쪽면에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원 연화동 피정의 집이 있다. 피정의 집을 지나 400m내에 좌측에 위치하는데 국도 밑을 지나서 가면 된다.

2. 연혁
신나무골 신자촌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하리를 중심으로 한 신자촌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완정, 왜관의 가실, 장자터, 동명의 어골 등을 포함한 인근의 신자촌을 말한다.
이곳 신나무골에 신자들이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815년 을해박해 때인 것 같다. 을해박해 때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원 산증의 우련밭과 곧은정 등지에 살고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만나 200여명이 체포되어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옥사하였다. 체포된 신자들 중 33명만이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이들의 가족과 다른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정이 대구와 하루거리로 가까우면서도 외딴 곳인 이곳 신나무골로 이주해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1862년 경 달성군 다사면 부곡에서 처음 신앙을 받아들인 이이전 안드레아 가정이 부락민들의 박해로 이곳 신나무골로 이사를 왔으며 이무렵 이이전 가정 이외에도 인근의 신자 가정들이 이사를 왔다. 이로 인해 외지에서 온 신자들과 이 지방 신자들이 합하여 큰 신자촌을 이루게 되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들이 사목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교구가 창설된 후 1837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해 성사를 주곤 했다. 그후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왔으며 병인박해(1862년) 이후 1882년부터는 김보록(Robert)신부가 순회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박해가 끝나자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과 새로 입교한 신자들이 모여 신자촌을 이루었다.
병인박해 후 이곳 신나무골에 부임한 신부님들이 전주, 부산 등지로 본당을 설립해 나감에 따라 신나무골은 대구본당과 전주본당, 부산본당의 산실이 되었다. 신나무골은 1894년 가실본당( 현 낙산본당)이 설립되면서 가실본당 소속의 공소가 되었으며 1926년 왜관본당이 설립되자 왜관본당의 공소가 되었고 1986년 2월 1일 신동본당이 설립된 이후는 신동본당 소속이 되어 있다.

3. 복원사업
1933년 왕 레지날도 신부가 신나무골 성지개발을 위해 모금을 시작해서 서상우 요한 신부와 현익현 바르톨로메오 신부때에 이르러 1977년 7월 11일에 제 1 차 성역화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영남교회 선교 요람지 기념비를 세웠다. 또한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여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이선이 엘리사뱃의 묘소를 이곳으로 이장하고 대구본당의 첫 본당터를 복원하여 김보록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과 전시관을 복원하고 김보록 신부의 흉상을 건립하였다.

복자성당

1. 연혁
한국천주교회는 18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며, 순교자들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기 위해서 각 교구별로 기념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대구대교구에서도 1964 11월 9일에 순교 기념성당 건립 기성회를 발족하고 또한 지부 조직을 설치하여 각 본당별로 순교자 기념성당 건립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에는 모금운동과 더불어 성전건축 기공식을 가졌으며 또한 순교 100주년이 되는 1966년 9월 12일부터 28일까지 본당 순회 순교자의 밤을 개최하여 순교자들의 신앙정신을 더욱 현양하였다.
따라서 순교자들을 위한 성전건립 등 현양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복자 성당이 착공 5년 만인 1970년 1월 1일 자로 성전이 준공되어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1970년 7월 5일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을 축성하고 1973년 10월 19일에 울산에서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김종륜 루가, 이양등 베드로 3위의 유해를 감천리 천주교회 묘지에서 복자성당으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해서 순교자 현양 기념성당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2. 복자성당의 순교자들
이곳에는 1868년 8월 14일 울산 동천 강변 장대벌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허 야고보, 김 루가, 이 베드로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무진박해 때 언양의 가날 산중에 은신하여 목기를 만들며 살던 세 분과 그 가족들이 진영 포졸에게 발각되어 순교했다. 당시 감영으로 잡혀가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러 따라 갔던 허야고보의 부인 박조아는, 치명터에서 가까운 동천강 둑 아래 세 사람의 시신을 묻을 구덩이를 발견하고, 머리는 치마폭에 싸서, 몸 전체는 한 사람씩 업어 날라 얼굴과 몸을 맞추어 가매장하였다. 이들을 장사지낸 조아 부인은 죽령 산중의 가족들을 데리고 대구로 옮겨왔는데, 해마다 장마철이면 강둑 아래의 순교자들이 잠든 묘를 찾아가 물이 불지 않았나 마음 초조해 하였으나 다행히 잘 보존되어 왔다.
그 후 시대가 달라져 교난이 그치고, 조정에서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따라서 세 교우의 유족들은 이들 순교자들이 치명한지 19년만에(1968-1887) 정식으로 경주 산내면 진목정 앞산에서 모셨다가 1932년 5월 29일 허인백 야고보의 손자 허명선 안드레아와 김종륜 루까의 손자 김병옥 요한에 의하여 대구 월배 감천리 천주교 묘소로 모셨던 것을 1974년 10월 19일 대구 복자성당으로 모셔 오늘이 이르고 있다.

주소 : 대구 광역시 동구 신천 3동 8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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