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사순특강 제5강 강의내용
사순특강 다섯 번째 마지막 강의는 ‘예수님의 삶 : 수난·죽음·부활’에 관하여
주임신부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삼위일체론’ 구절을 시작기도로 바치며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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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순특강 마지막, 다섯 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하여, 부활의 삶에 대하여
묵상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이 세상을 살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느끼는 가장 큰 두려움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마 죽음일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죽음을 봅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부와 권력을 누린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허무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은 인간조건이고 운명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위대한 인물도 자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에 앞서, 이런 죽음은 어떤지 생각해 봅시다.
이분이 누구입니까? (*사진)
최근 한·중·일 사이에 민감한 사안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인물, 안중근 Tomas 의사!
이분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지 벌써 100년이 지났습니다만 볼수록 자랑스러운 그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포승줄에 묶여 칼을 찬 일본헌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두 동생과 외국신부님을 만나 얘기하는 모습, 사진에 담긴 모습입니다.
눈을 부릅뜬 당당한 모습, 죄인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했다. 뜻한 바를 다 이루었다. 이제는 나에게 주어진 길을 가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후회도 두려움도 없는 모습입니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구차하게 변명하거나 살려달라고 애걸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손수 빚어주신 수의를 입고 당당히 하느님께로 가신 자랑스러운 조상이십니다.
그분의 유언대로 언젠가 그분의 시신이 조국에 돌아오는 날, 슬퍼하고 통곡해야 하겠습니까?
억울하고 분하다고 땅을 치고 아파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 앞에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고, 당신을 심판하고 죽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죽고 없어졌지만,
죽임을 당한 당신은 오히려 수많은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고,
당신 같은 훌륭한 분을 우리의 조상으로 모신 우리가 행복하다고,
당신 뜻대로 조국은 자유를 되찾았고, 지금 우리는 당신과 함께 행복하다고,
온갖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풍악을 울리고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는 부활의 생명!
당하는 죽음이 아니고 스스로 내놓는 죽음!
살아서 죽는 죽음의 모습!
최근 우리가 아는 인물이 십니다.
2000년이 넘도록 해마다 거룩하고 장엄하게 기억되며 재현되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 해 봅시다.
"Ecce Homo!", "자, 이 사람이오!” (요한 19.5)
Roma 총독 빌라도가 군중 앞에 예수님을 세워놓고 외친 말입니다.
이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 앞에 끌려나온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Roma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살이 찢어지고 피가 묻어나는 심한 채찍질을 한 다음,
“네가 유다인의 왕이냐?”는 조롱과 침 뱉음을 받으며, 임금이 입는 색 자주색 옷을 걸치게 하고,
임금의 상징인 왕관 대신 가시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채찍을 맞아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고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해 떨구고 계신 모습입니다.
Roma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
용서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청할 것이고 그러면 못 이기는 척 예수님을 풀어줄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놀랍게도 사람들은 더 큰소리로, 그를 죽여야 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Roma 총독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하고
손을 씻고 예수님을 군중들에게 내 주었습니다.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무죄임을 알았고, 마지막 인간의 양심에 호소했지만 소용없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죽음은 어두운데서 몰래 일어난 일이 아니라
2,000여년 전 인간역사 안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명백한 큰 사건이었다.
어쨌던 재판도 받았고, 판결도 받았으며 절차에 따라 사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이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동안
아무도 그분의 억울함을 헤아리거나 옳음을 편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소외된, 계획된 처형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도움의 손길을 빌었으나 그나마 응답이 없었습니다.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동안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세상은 그래서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두목인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아 죽였고, 그를 따르던 몇몇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없고,
군중이야 며칠 지나면 다 잊을 것이고, 그래서 모든 게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보였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인간의 하느님께 대한 도전장이었고,
예수님은 그 제물이었습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마태 27,40)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마태 27,43)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두목이 죽임을 당할 때 그를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떠들어 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달아 죽였던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 (사도 2,32)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몇 일전에 한 짓, 십자가에 달아 죽인 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계신 그분을 만났고, 봤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의 증인이고, 목격자라고 말합니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살아서 죽기를 원했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노래했습니다.
전에는 죽기가 두려워 도망갔던 그들이 이제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다시 살겠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작정한 사람의 말은 힘이 있습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예루살렘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거렸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말이나 되는 일이냐?’ 하며,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이 무덤을 지켰던 군인들을 돈으로 매수해서
소문을 덮어보려고 시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잡아 죽이면 죽일수록 더 큰소리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죽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것이 부활체험이고 부활신비입니다.
부활은 우리 가운데 의로운 한 인간이,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죄 값을 치르고 죽음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 길은 철저히 자신을 낮추는 길이요,
고통의 길이며 마침내는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 분이 몸소 그 길을 가셨고 그 길이 마침내는 하느님 안에서의 새 출발, 새 생명, 구원의 길임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와 같이 죽자, 그리고 영원히 나와 함께 살자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자기 자신을 죽이기를 작정한 사람이 부르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또한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살려달라고 울부짖은 기도에의 하느님 아버지의 응답입니다.
당신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고 죽기까지 순명한 예수님의 손을 들어 주신 것이고,
죽음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신 것입니다.
옳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있어 부활은 죽은 다음의 문제가 아니라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내려야 할 결단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은 살아있는 인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살아서 죽기를 작정한 사람처럼 살아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한 번은 신문사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한 가지 물음을 던질 수 있고, 하느님이 그 물음에 반드시 답을 한다고 전제 할 때
어떤 물음을 던질 것인가에 대한 조사를 했더니, 조사에 응답한 사람들한테서 두 번째로 많이 나온 물음이
“하느님, 제 인생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였습니다.
참고로 가장 많이 나온 물음은 “이 세상에 왜 고통이 있습니까?”였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 발표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흔한 질병이 우울증이고, 가장 많이 팔리는 약도 우울증 약 이라고 합니다.
주위에도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지 못해 힘들어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고
특히 청소년들이 너무 쉽게 자신의 귀한 삶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상실할 때 삶은 피곤하고 견디기 힘든 것처럼 생명의 불꽃은 사그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까?
내가 정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누가 정하나요?
철학 격언에 “존재는 사고를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있는 것은 있기 전에 먼저 생각되어 진다는 말입니다.
그냥 얼렁뚱땅하다가 이런게 생겨났네,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만물, 해와 달, TV와 시계, 휴대폰과 자동차... 등등 내가 생각을 안했을 뿐이지 누군가가 밤잠을 설치며
숱한 날 고심 고심 끝에 생겨난 것들입니다.
생각이 존재이유, 존재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생겨나기 전에 나를 생각했는가?
계획하고 준비했는가? 어머니가 하셨나?
아닙니다.
세상만물은 그저 생겨난 것이 없는데, 이유없이 있는게 없는데 나만 그저 생겨났다고? 아닙니다.
몰라서, 인정 안해서 그렇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그 삶이 온전히 바뀌어 부활의 삶을 사신 사도 바오로의 삶을 따라 묵상 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9,10)고 합니다.
어쩌겠다는 행동입니까?
죽기를 작정한 사람의 행동입니다. 죽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어느 모로 보나 예수님의 12제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적 열심, 사회적 신분, 신학에 대한 학문적 깊이....
사도행전 9장에서 개종하게 된 과정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오로가 예수님(부활하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를 지켜보고 계셨고
결정적인 계기가 주어졌을 때 꼼짝없이 당신의 사람이 되도록 섭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대제관에게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고 다마스커스에 남아 있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에
말이 놀라 뛰었고 사울은 땅바닥에 떨어졌으며 털고 일어나니 앞을 볼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버릴려고 버린 것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바오로는 다 버린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장님이 되었으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으며
그는 이제 남의 도움 없이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소리를 듣게 되고
“주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하고 대답합니다.
참으로 극적인 만남입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로 가게 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때 사울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을까요?
아닙니다.
지난 간, 살아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토록 이루고 얻고자 애썼던 모든 것들, 열심, 성취, 명예, 율법... 그런 것들이 다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바오로는 그러한 모든 것들 즉,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고 애쓰고 이뤘었던 것들을
한마디로 “쓰레기”로 여긴다고 말합니다(필립3,7-8).
그리고 그는 노년에 그의 편지글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필립1,21)고 고백합니다.
즉 당신 뜻대로,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당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허물과 약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며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시겠기에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2고린12,10)고 노래합니다.
결론으로 사도 바오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습을 두고 오늘 내가 내모습인 것은, 내가 살아온 삶은,
내가 원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뜻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삶 안에 주어진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1코린 1,22-25)
다시, 나는 어떻게 생겨났으며, 삶의 의미(목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는 성서 말씀은 내가 있기 전에 하느님께서 나를 두고 생각, 계획, 사랑하셔서
내가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배제하고 인생에서 참 의미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시작을 내가 안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인간은 하느님 안에 있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장애인이 숨을 헐떡이며 한걸음씩 떼어 놓고는 무슨 큰일을 해낸 것처럼 좋아합니다.
또 한걸음, 한걸음 떼려고 애를 씁니다.
인간의 눈에는 의미없어 보이지만 하느님이 주신 삶이기에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서 기뻐하고 좋아합니다.
입으로 붓을 물고 힘들게 무언가를 그려 놓고는 기뻐합니다.
그리스어 “열정”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를 보면,
Evθεos(enthusiasm)인데 ‘하느님 안에 머물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면 어떤 처지에 처하든, 어떤 어려움을 겪든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말입니다.
샘솟는 삶에의 투신,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언제, 어디서 오는가?
삶의 목표가 뚜렷할 때 일 것입니다.
목표가 뚜렷하다는 말은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묻고 찾는 삶이 신앙의 삶일 테고 기도하는 삶일 것입니다.
끝으로 부활하신 주님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만나 뵈올 수 있을까?
(마르 16,17) “갈릴레아로 가거라,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죽음의 자리에 머뭇거리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곳이었고, 그 분이 사람이 된 곳,
그들의 본래의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갈릴레아 호수 거기로 가라는 것이고 거기서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삶에서 기쁘다가도 슬프고 힘들고 때로는 억울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그 속에 내가 있다는 말씀이겠고 나는 항상 너와 함께 한다는 말씀일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굶주리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그러한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31-46)
그들 안에 당신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