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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사순특강 제4강의 내용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자 : 2015.03.20 조회수 : 912

사순특강 네 번째 강의는 마태오복음서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하여

폴린수녀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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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의미

 

시작 기도

 

기도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아버지, 이 시간 시작부터 마침까지 함께 하시어

은혜로운 사순시기를 지내는 저희가

주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얻게 하시고,

또한 오늘 십자가의 의미를 전하고자 하는 저에게 지혜의 성령을 내려 주시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희망을 전하는 도구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도입

찬미예수님! 저는 박 폴린 수녀입니다. 오늘은 네 번째 사순특강,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기도 중에 가장 먼저 익힌 기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아이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신 기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또 우리가 기도를 할 때 시작과 마침에 무슨 기도를 가장 먼저 합니까?

예! 그렇습니다. 성호경입니다.

성호경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동작에 온 마음, 정성, 힘을 기울여 드리는 기도입니다.

정성스럽게 천천히, 시원하게, 이마에서 가슴으로,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이렇게 온 몸에 십자성호를 크게 그으면서 십자가의 표시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골수에 이르기까지 성화시키시는 일 또한 이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기도에 앞서, 일에 앞서 성호경을 그으며 지향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고

그 구원의 초대에 응답합니다.

성호경은, 성호를 긋는 것은 하느님이 베푸신 축복이 우리 안에 머물도록 하는 기도가 됩니다.

 

자, 그럼! 이 시간 강의를 시작하려는 저와 또 경청해주시는 여러분 모두를 강복해 주시는 하느님께

각자의 지향을 담아 다시 한 번 성호를 정성스럽게 긋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전개

1.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

네, 오늘의 주제는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마태오 복음에 대해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각 복음서는 복음사가들이 강조하고 싶은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중 마태오 복음사가는 특별히 <행동하는 예수님,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며

저항하는 예수님, 구체적인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원후 8-90년에 쓰여졌습니다.

따라서 구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구약성경을 가장 많이

인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주제는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십자가의 의미이지요.

마태오 복음서의 몇몇 말씀을 택해서 여러분과 함께 묵상한 것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과 마태오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의미를 나누기 위해 강의를 준비하면서,

먼저 마태오 복음에 ‘십자가’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관찰해 보았습니다.

모두 17번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보다 많이 나오고 있었지요.

마르코복음서에 13번, 루카복음서에 7번, 요한복음서에는 14번이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마태오 복음서를 천천히 읽으시며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1. 10: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2. 16: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3. 20:19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4. 23:34 그러므로 이제 내가 예언자들과 현인들과 율법 학자들을 너희에게 보낸다.

그러면 너희는 그들을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또 이 고을 저 고을 쫓아다니며 박해할 것이다.

5. 26:2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이 지나면 파스카인데, 그러면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6. 27:22 빌라도가 그들에게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하니, 그들은 모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였다.

7. 27:23 빌라도가 다시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하자,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쳤다.

8. 27:26 그래서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9. 27: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10. 27:32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11. 27: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12. 27: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13. 27: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14. 27:40 이렇게 말하였다.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15. 27:42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16. 27: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17. 28:5 그때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찾는 줄을 나는 안다.

 

2.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순 첫째 강의 때 주임신부님의 강의를 통해 십자가의 참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지요? 저와 함께 다시 기억해 볼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이 분이 누군지 모르는 비신앙인들은

고통이나 죽음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나,

믿음을 가진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셨기에 외아들 보내시어 고통과 죽음 가운데 두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참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죽음까지 이겨낸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3. 십자가 사건의 원인, 의미

십자가 그 자체는 고통, 불의, 실패, 절망, 수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인내, 순종, 신의, 침묵 등으로 극복하셨으므로

극기, 사랑, 봉사, 희생, 친교, 자기 극복을 드러내는 표지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상징물이 아닙니다. 상징물이기 이전에 사건입니다.

그것은 바오로사도의 말씀대로, 인간의 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하느님의 지혜,

무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능력, 무력하게 보이는 하느님의 권능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외적인 원인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내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우선 외적 원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반발,

유대인들의 신관 문제 곧 메시아관의 차이에서 오는 반대입니다.

그럼, 십자가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짧은 영상물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합니다.

몇 몇 선택의 순간들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영상물 - 다리 보기

 

어떠십니까? 아버지의 심정, 아들의 마음. 그 두 사람의 선택!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 아들의 선택.

하느님과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선택을 비춰주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의 절정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당신 자신을 죽기까지 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겠는가!

예수님은 공생활를 시작하실 때부터 계속해서 사랑을 선포하셨습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마태 22: 37-40).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 13:34)

예수님은 말씀 만으로만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사랑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4. 마태오가 강조하는 예수님의 모습

마태오 복음사가가 중요하게 여긴 예수님의 모습은 <행동, 저항하는 예수님>,

<가난한 이들을 존중하는 예수님>입니다.

가난한 이, 즉 사회의 약자와 병자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적인 병만을 고쳐 준 것이 아니라 죄에 찌든 이들을 용서하시며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주었습니다.

이렇듯 행동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하는 마태오 복음서 16장 24부터 28절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모두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태오 16, 24-28

2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름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마르코 복음사가에게서 배웠습니다.(마르코 8,31-34 제 십자가; 9,30-37

꼴찌; 10,32-45 섬김) 마태오 복음사가는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이

심판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마태오 7,21)

또한 24절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조건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예수님의 삶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정도의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생생하고도 구체적인 현실을 가리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한다.”

마태오 복음 16장 24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한 것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1) 자신을 버리고

우리가 어떻게 자신을 버릴 수가 있을까요? 여기서 ‘자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찾으려고 하는 자아, 자존심, 자애심, 욕망 등입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 그것은 곧 우리가 매일의 삶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바치게 되는 희생, 봉헌일 것입니다.

즉 가족이나 이웃을 잘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싶은 물건들,

내가 즐기고 오락이나 취미생활, 누리고 싶은 여가들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내가 하기 싫은 힘들거나 궂은일들 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소한 십자가로 다가올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신 주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과 믿음, 희망만이 기꺼이 나를 버리게 하고,

내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질 힘을 줍니다.

 

2)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두 번째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 라는 말을 들으면

흔히 '고통스럽다, 힘들다, 외롭다, 슬프다.' 같은 단어를 연상하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을 들으면

예수님 뒤를 따르는 길은 힘들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28-30).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고통뿐이라면, '나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십자가'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없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가 뜻하는 고통, 죽음, 고독, 슬픔 등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 평화, 안식, 기쁨, 행복을 추구하는 ‘기쁨의 종교’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십자가를 감수(감내)할 뿐입니다.

좁은 문 안쪽에 있는 행복을 찾아서 좁은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목숨을 걸고 예수님의 삶에 어긋나는 것들에 저항한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마태오가 전하는 다음 말씀 안에서 예수님의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찾아보기 위해서입니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마태오 7,21-23)

 

저는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가르침을 세 가지로 요약해보았습니다.

 

첫째, 실천 없는 신앙고백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어떤 이론과 교훈,

머리로 이해한 사실만이 아닙니다.

‘실천적 행동’이 따를 때 우리의 믿음이, 신앙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머리로는 깨닫고 잘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

그래서 육신의 머리에서 심장까지는 불과 1미터도 되지 않지만, 머리에서 마음,

그리고 실천으로 이어지기 까지는 무척 멀고도 힘든 여행이지요.

 

둘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채택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의 운명을 따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셋째, 최후심판은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십니다.

판사는 예수님이요 증인이자 배심원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서는 <가난한 이>에 대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가난한 이’일까요? 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독일 가톨릭 부인회 초정으로 에쎈에서 강연을 했는데,

주제가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회장과 임원들이 수녀님께 인도 캘커타의 활동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정색을 하며 “먼저 여러분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십시오.

낯설고 멀리 있는 소외된 이들보다 여러분 (곁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소외된 이들을 먼저 돕고

캘커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셨습니다.

 

정리

십자가를 지는 방법

모든 복음서가 그렇지만 특히 마태오 복음사가는 행동하시는 예수님, 실천하시는 예수님,

가난한 이들을 구체적으로 돕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합니다.

또 앞서 알아본 것처럼 다른 복음서에 비해 ‘십자가’라는 표현이 더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몇몇 텍스트 안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물론 삶의 자리에서 여러분 각자의 고유한 십자가,

또 그 십자가를 지고서 살아가고 계신 여러분이심을 압니다.

저 또한 제가 말씀드리는 이 방법들을 스스로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께 꾸지람을 톡톡히 듣겠지요.

그래서 저도 단단히 다짐을 하고, 여러분께 나눕니다.

 

1) 각자의 십자가는 안성맞춤형입니다.

불가에서는 생로병사 모두가 ‘고’(苦)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늘 고통이 따릅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니고 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십자가보다 자신의 것이 더 크고 무겁게 여겨집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듯, 다른 사람의 십자가는 작고 가벼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각자가 질 수 있는 크기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ex) 십자가 창고

 

예화 : 십자가의 무게

한 학자가 불만에 찬 어조로 하느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것은 몹시 불공평한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요르단 강변으로 불렀습니다. 요르단은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마치고 건너오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강을 건너왔습니다. 하느님은 그 학자에게 말했습니다. "저들이 지고 온 십자가의 무게를 다 달아보아라." 학자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강을 건넌 사람들의 십자가를 모두 달아보았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큰 십자가도 아주 작은 십자가도 그 무게가 똑 같았습니다. 학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하느님만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십자가를 줄 때 누구한테나 똑같은 십자가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가볍게 안고 살고,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쇠 덩어리처럼 무겁게 짊어지고 산다. 내가 늘 똑같이 공평하게 주지만 이렇게 저마다 다 다르게 받는 것이 삶이라는 십자가다."

 

이 우화는 누구의 고통이든 고통의 무게는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우화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은 가벼워 보이는데 왜 나의 고통은 이렇게 무겁고 힘드냐고 항의하듯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가장 알맞고 편안한 십자가는 지금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2) 십자가는 천국 가는 다리입니다. *영상보기 - 십자가 자르는 얘기(1분)

우리가 영원히 바라 볼 유일한 대상이자 천국의 열쇠, 천국 가는 다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 각자의 삶의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 때문에... 길이 때문에... 때론 힘들지만...

결국 그 십자가는 하느님 나라의 다리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은 기쁨의 길입니다.

물론 십자가 자체가 기쁨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으려고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걷는 것입니다.

 

3) 또한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사다리입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과 시련들을 내 신앙과 사랑을 더 순수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생활 중에 겪는 고통 중에서도

행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시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1,6-7)

주변에 나를 귀찮게 하고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면 이해심과 인내심을 배울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해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은 원한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를 보내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근육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사람들이며 이해와 인내를 훈련할 기회를 주는

스승입니다.

십자가가 결국 은총이라는 그 깨달음이 빨리 이루어지면 질수록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다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지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그 모든 실패와 좌절, 고통과 십자가야말로

우리를 보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하느님의 손길임을 저는 굳게 믿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체험하는 갖은 불행한 사건들은 우리를 보다 영적인 인간,

기도하는 인간으로 거듭나도록 하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면 좋겠습니다.

 

4) 십자가를 감사거리로 바꾸면 선물이 됩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 사람에 대하여 감사하도록 시선을 바꾸어 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즉, 80%가 부정적인 마음을, 단 20%만이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합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의 흐름에 따라가려고 하면 당연히 부정적인 마음을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안경 낀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왜 안경을 쓰셨나요?” 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꾸했습니다. “눈이 나쁘니까 썼죠!”

또 한 사람은 노래하듯 말했습니다. “세상을 더 잘 보려고요.”

저는 항상 눈이 나쁘다고 썼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말할 때 좀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대답해야겠습니다.

긍정적인 마음들이 아름다운 말을 만들어 냅니다.

 

결론 및 마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유일하며 홀로 서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때에만 주어집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란 주님께 내 모든 권리를 맡기고 주님만을 따를 때 오는

고난의 체험들을 의미합니다.

곧 십자가의 의미는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의 의미는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관심과 같아진다는 뜻입니다.

환난, 십자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받는 고통을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기꺼이 바침으로서

나와 이웃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한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진다면

하느님이 인류를 사랑하기 위해 고통을 받으신다는 놀라운 신비를 작게나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한다면 고통 중에도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암과 투병하다가 5년 전에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한 선배 수녀님의 이야기를 나누며

이 시간 마칠까 합니다.

그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제 마음에 간직된 내용을 나누며 마침기도로 대신할까 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십자가, 하느님의 안목과 마음이 담긴 선물임을 헤아리면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우리들이기를 빕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암은 저에게 십자가요 선물이었습니다.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이 가득 담긴 것이지요.

선물을 준비할 때 받는 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암은 저에게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비록 지기 힘든 십자가이기도 하지만, 귀한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건네시는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선물이기에

저는 암을 저의 사도직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저는 암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암을 통하여 이웃들의 사랑과 배려를 더욱 느끼게 되었고, 암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남아있는 어머니, 슬퍼할 가족들을 생각하면 저 또한 마음이 아프지만

제가 암과 함께 하늘나라로 돌아가면 여러분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다시 만나는 날까지 말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