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에 눈을 뜨니 (사순특강 5차)
은총에 눈을 뜨니
-구상-
1
이제야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 한 가지지만
출구가 없었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스럽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2
이제는 신비의 샘인
목숨의 시간들을
헛된 욕망으로 흐리고 더럽혀서
연탄빛 폐수로 흘혀보내진 않으련다
나의 삶을 감싸고 있는
신령한 은총에 눈떴으매
현재로부터 영원을 살며
진선미의 실재를
스스로 증거하여 보이리라
지난날 나는 똑똑히 보아왔노라
눈에 보이는 사물만을 받들어 섬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도리는 외면하던
모든 소유의 무상한 파탄을!
그리고 나는 또한 보아왔노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굳게 안고서
영원의 깊은 요구에 응답하는
마음 가난한 이들의 불멸의 모습을!
이제 나에게는
나의 무능과 무력도 감사하고
앞으로 살기에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순결,
그 하나뿐이다